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 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by 빅보스 마스터 2023. 8. 9.

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오펜하이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난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인류 최고이자 최악의 발명품,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하지만 그 발명으로 소련의 스파이 의심까지 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인물, 오늘은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되어 인간 전멸을 경고한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양복 사업으로 승승장구해, 오펜하이머가족은 뉴욕에서 상당한 갑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집안의 교육 환경 지원과 오펜하이머의 빠르고 탁월한 학습 능력으로 그는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합니다. 하버드 시절, 그는 남들보다 15배 많은 학점을 따며, 4년 과정을 3년 만에 최우수 졸업합니다.

전공 공부뿐만 아닌 언어에도 상당한 두각을 나타내던 오펜하이머는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그리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버드를 3년 만에 최우수 졸업했으나, 물리학에 더 관심을 두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물리학계에서 중심에 더 가까운 영국 케임브리지로의 유학을 선택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보다는 독일, 프랑스, 영국이 과학의 선진국이었고, 특히 20세기 초 신학문이었던 양자 역학을 교수할 수 있는 대학은 미국에 없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존 톰슨의 연구실로 들어간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의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제약과 우울증에 걸립니다. 실험 물리학자인 지도 교수 블랙킷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좌절감과 질투심으로 독 바른 사과로 독살하려는 등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즐겨 읽던 프로스트 등의 문학 작품은 그의 정신을 안정시켰고, 점점 물리학에 심취하면서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오펜하이머에게 관심을 갖던 괴팅켄 대학교 물리학 연구소장인 보르는 오펜하이머를 독일로 초청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보른을 필두로 양자 역학이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물리학 분야의 재미를 느끼게 된 오펜하이머는 우울했던 영국을 떠나 독일의 괴팅캔 대학교로 떠나게 됩니다. 게틴캔에서 적응한 오펜하이머는 무려 17개의 논문을 출판하며, 9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론적인 면만을 다루는 괴팅켄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공부했던 그는 1년 전 불안했던 정신은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스타가 된 오펜하이먼은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캘리포니아 버클리 분교에서 각각 강의를 하게 되며,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양자 역학과 천체 물리학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게 됩니다. 그러나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에게 편지가 한 통 오게 됩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상대성 이론의 주인공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 원자탄의 아버지 맨해튼 프로젝트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상대론에서 유도된 질량, 에너지 등과 원리가 현재 발견된 핵분열의 응용이 된다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폭탄이 만들어질 것이라며, 이러한 무기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 손에 먼저 들어간다면 끔찍한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은 루스벨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히틀러보다 빠르게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해 곧장 맨해튼 프로젝트를 승인합니다.

루스벨트의 지시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비밀리에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맨해튼에 소집시킵니다. 최초로 원자로를 만들었던 엘리코 페르미를 비롯하여 오펜하이머, 한 스베테, 에드워드 텔러, 월러드 리비, 레오, 샐러드, 핼러드, 유리, 리처드 파인만, 줄리아 슈빙거 등 물리학 어벤저스가 소집되게 됩니다. 어떤 조직에도 수장은 있는 법.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포함된 거대 연구진과 함께,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책임자를 누구로 선정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최초 책임자로 거론되던 페르미는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다른 후보자로 오펜하이머가 거론됩니다. 하지만 당시 오펜하이머의 주변에는 공산주의자나 좌익사상에 경도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오펜하이머 본인은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친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잠시 공산당에 익명으로 가입했던 적이 있었고, 오펜하이머의 아내였던 키티 역시 한때 자익 사상에 빠졌었으며, 키티의 전 남편이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로 직접 참전해서 전사를 하였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 장성들은 오펜하이머의 충성심과 사상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다만 당시 오펜하이머의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동료였던 한스베테는 오펜하이머는 극도로 머리가 좋았다. 이해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제가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있다며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미국 상부는 오펜하이머를 채용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프로젝트 총괄이었던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정보와는 관계없이 내 지시를 따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허가를 지체 없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는 프로젝트에 절대적으로 필수입니다라는 편지를 쓰며 오펜하이머를 추천합니다.

 

이렇게 노벨상을 받았었고, 미래에도 받게 될 거대 어벤저스 연구진의 총책임자로 오펜하이머가 결정됩니다. 뉴 멕시코의 사막지대에 거대 연구 기지가 세워지면서, 책임자가 된 오펜하이머는 프리스턴, 시카고, 버클리 등지에서 동일하게 진행되던 핵분열 연구를 한 곳으로 모아 공동 연구를 하도록 강조했으며, 전국에 퍼진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기관들의 연구개발 활동을 통합하여 사용 가능한 핵무기를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됩니다. 이때, 뉴멕시코 로스앨레모스에 세워진 비밀 연구소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포함하여 총 6천여 명이 거주하는 하나의 마을일 정도로, 맨해튼 프로젝트는 당시 약 20억 달러, 현재 가치로 총 300조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였습니다.

 

| 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패망하게 되지만, 미국은 이미 최초의 원자폭탄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1945년 7월, 류 멕시코의 알라모그드로 폭격 연습장에는 가제트로 불리는 실험용 폭탄이 30m 높이의 철탑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그로브스, 오펜하이머, 로렌스, 페르미 등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초의 핵폭발이 일어났습니다.

 

20 킬로톤의 tnt와 맞먹는 수준의 폭발이 일어나 직경 76m의 크레이터를 만들었고, 충격판은 반경 160km에 달했습니다. 크레이터 안에는 고열로 인해 지표가 유리질로 변형되었고, 이 유리질은 트리니 타이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폭발과 충격파는 뉴멕시코 전역에 떠들썩하게 퍼졌지만, 정부의 공식 답변은 엘레오고도 공군기지에 무인 탄약창고가 폭발했다는 짧은 언급분이었고,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을 만큼 비밀리에 진행이 되었던 테스트였습니다. 한편,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오펜하이머와 로스엘레모스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원자폭탄에 대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토론이 있을 정도로, 사용 문제는 큰 고민으로 다가왔습니다.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로제는 이 나라가 핵무기를 살아있는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주제로 발언한 오펜하이머가, 우리 모두는 끝없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도록 되어 있지만, 폭탄은 또한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오펜하이머를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은 당시 모인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었고, 그들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트리니티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끝난 직후, 당시 일본 제국은 1억 총 옥세를 외치며 끈질길 정도로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이 저항 때문에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던 미국은 빠른 전쟁 종결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20억 달러의 거금이 들어갔던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비밀로서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20억 달러를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먼저 폭탄의 카드를 만지게 됩니다.

 

| 실험이 아닌 실전

결국, 오펜하이머와 연구진들이 세계 최초로 실험용이 아닌 실전을 위해 제작한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폭발시킵니다. 리틀 보이는 우라늄을 이용한 폭탄으로, 화력은 15 킬로톤으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리틀보이의 투하 이후에도 항복을 하지 않았던 일본에게, 3일 뒤, 이보다 더 강한 역사상 첫 플루토늄 원자 폭탄인 팻맨을 나가사키에 투하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하게 되며, 한국도 광복을 맡게 됩니다.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국의 광복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 역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과학 무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였던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장을 그만두고 대학교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통해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게 된 오펜하이머는,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아이제나와 대통령에게 건의하며, 개발 계획에도 참여합니다. 하지만 동서 냉전 기류가 심해지고, 미국과 소련 간의 무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미국이 수소폭탄 개발을 진척시키려 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도덕적 견지에서 협력을 오랫동안 거절했습니다.

 

그 대신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주도한 원자력위원회를 통해 미국과 소련 상호 수소폭탄을 제조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체결하도록 제안을 하기도 하며, 수소폭탄 연구를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대통령의 긴급 계획이 수립되며, 로스 알라모스에서 1951년 수소폭탄 실험이 성공하게 됩니다. 소련 역시 곧바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며, 1954년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에서 미국을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 오펜하이머의 몰락과 오해

이에 미국 내 반공주의와 결부되며, 반액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1954년 4월 12일부터 5월 6일까지 오펜하이머의 과거 행직과 사상에 대한 검증을 하였는데, 1930년대 공산주의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수소폭탄 제조 반대 태도를 물어 원자력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없게 조치를 하게 됩니다.

 

이른바 오펜하이머 사건으로 그의 경력이 끝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미국의 과학 영웅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은퇴를 하며, 1967년 후두암으로 향년 62세에 사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2022년 12월 15일, 제니퍼 글레올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에 대해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은 위원회 자체 규정을 위반한 결함 프로세스라며 오펜하이머 박사가 겪은 과정의 편견과 불공정에 대한 더 많은 증거가 밝혀졌고,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의 증거는 앞으로도 확인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68년 만에 오펜하이머는 구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박사의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필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케이워드는 1954년 오펜하이머가 당한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국가 명예의 오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마침표와 한국 광복 시작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오펜하이머 박사. 지금까지 인류 최고이자 최악의 발명품,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를 알아봤습니다. 책이 어렵다면 8월 15일에 개봉 예정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펜하이머를 꼭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